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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아침마다 딸아이 등원을 위해 긴 지하철 투어를 한다. 동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보내면 되지 않느냐라는 의문이 든다면, 딱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짧은 답변 밖에는 못할 것 같다. 어찌됐든 기나긴 지하철 여정은 특히 습하고 더운 여름철에는 더더욱 고행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긴 여정 끝인 도착지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한 두달 전부터 에스컬레이터 보수공사로 인해 매번 긴 계단을 오르곤 했는데, 날씨가 더워지면서 이 계단을 오르는 게 성인인 나 조차 좀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엘레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근데 신기하게도 딸아이는 저번에도 계단으로 가자고 하더니, 오늘도 계단으로 가자고 나를 조른다. 나는 저번처럼 엘베타고 가자고 엘베 쪽으로 끌었지만 계단으로 가자는 딸아이의 요청을 매번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못이기는 척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엘레베이터보다 계단이 더 좋아?”
“응, 계단 좋아”


덥고 습한 날씨에 굳이 긴 계단을 오르는 게 좋다니. 나중에 커서 철인 3종 경기를 나가려는건가 싶었다. 계단 앞쪽에 와서 계단을 오르려 하니 딸아이가 말한다.

“즐겁게 올라가자!”

‘???’

엥? 즐겁게 올라가자? 계단을?
순간 머릿 속 회로가 1초 정도 꼬였다가 풀렸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계단 오르는게 재밌어?“
”응, 즐겁게 올라가자~“


즐겁게라.. 계단을 즐겁게 올라가자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해봤는데, 엘베 대신 계단을 선택하고, 굳이 즐겁게 오르자는 딸아이가 신기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즐거워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야 하니까 즐겁게 올라가자고 한건가? 일단 딸아이 말을 따라 즐겁게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래도 혼자선 좀 어려운 감이 있어서 딸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며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올라갔다. 즐겁게 올라간 게 맞나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평소보다는 즐겁게 올라간 것 같았다.

즐겁게 올라가자라는 딸아이의 말이 하루종일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동안 내가 ‘즐겁게’라는 단어를 너무 놓치고 살았나? 뭐든 앞에 ‘즐겁게’라고 붙이니까 생각이 달라지는 거 같긴 한데 말이지.
그래, 어디 한 번 즐겁게 하루를 지내볼까?

즐겁게 가자
즐겁게 먹자
즐겁게 말하자
즐겁게 일하자
즐겁게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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